초여름, 서촌의 저녁은 느리게 내려앉습니다. 늦은 볕이 가게 안쪽까지 깊이 스며드는 동안, 그 문 앞으로는 지나간 사람들의 시간이 얇게 한 겹씩 쌓여갑니다. 서촌의 많은 이야기는 그렇게, 느린 저녁 속에서 조용히 시작되곤 합니다.
이번 이야기도 그런 시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전시를 보고 내려오던 어느 날, 발길이 닿는 대로 들어선 작은 공간 하나. 그 안에서 사람들은 천을 만지고, 작업 이야기를 나누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유리를 다루는 김은주 작가와 실을 엮는 오수 작가, 그리고 라마홈이라는 공간이 서로의 시간 안으로 천천히 스며든 것도 그 무렵의 일입니다.
처음엔 그저 지나치던 가게가 어느새 가장 익숙한 자리가 되고, 어느 날엔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사람이 생기는 동네. 라마홈의 일곱번 째 레터는 그 느린 시간이 만들어낸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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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와 빛, 서로의 풍경이 되어
김은주, 오수 작가
서울 한복판에 '촌'이라는 이름이 붙은 동네가 있다. 약속 없이 나섰다가 아는 얼굴을 만나고, 건너건너 들은 소식이 골목을 돌아 다시 돌아오는 곳. 창작자들이 유독 많이 모여 사는 동네이기도 하다. 작업실을 숨겨둔 사람들이 골목마다 있고, 한 다리만 건너면 또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한 서촌 주민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서촌에 한 번 들어오면 쉽게 나가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살아보면 알게 되는 말이다.
라마홈도 그렇게 만들어진 인연들 위에 서 있다. 오늘 소개하려는 두 사람 역시 그 인연에서 시작되었다. 실로 이끼를 만드는 오수 작가, 그리고 빛을 유리 안에 담는 김은주 작가. 소재도 다르고 걸어온 길도 다른 두 사람인데, 나란히 놓으면 이상하게 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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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틈 사이의 이끼 | 오수
오수 작가는 프랑스에 살던 시절 실을 처음 잡았다. 그곳에서 보낸 3년, 이사와 이동이 잦던 시기에 친구에게 우연히 니팅을 배웠다. 짐은 줄이면서 실은 오히려 늘어났다. 어디서든 이어갈 수 있는 작업이었기에 비행기 안에서도 실을 떴고, 가방 속에서 오래된 영수증이나 티켓을 발견하면 그것도 작업 재료가 됐다. 이동하면서 손이 기억한 것들이 지금의 작업이 되었다.
이끼를 처음 발견한 건 산책 중이었다. 잠시 쉬다가 콘크리트 틈 사이에 아주 작게 자라난 이끼와 눈이 마주쳤다. 숲속 바위를 가득 뒤덮은 이끼가 아니라, 도심의 벽 사이에서 조용히 버티는 이끼. "어딘가 기괴하면서도 귀여운 생명력"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 작은 발견이 지금까지 이어온 작업의 중심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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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타일 재료와 핸드니팅을 기반으로, 작은 코스터부터 공간을 채우는 커다란 조형물까지. 오수 작가의 작업은 작은 이끼에서 시작해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자라나고 있다. 실로 만든 이끼를 사람들이 진짜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것을 만들고 싶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건 가장 정확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실을 고를 때 그녀가 찾는 건 동물의 털이나 식물 줄기를 확대했을 때 보이는 작은 털처럼, 바람에 살랑이는 풀풀거리는 느낌이다. 이끼 코스터와 이끼돌을 비롯해 다양한 이끼 작업으로 확장되는 지금도 그 기준은 변하지 않았다. 작업관을 한 문장으로 묻자 그녀는 짧게 답했다. "현재의 나의 생각을 담는 것." 완성에 대해서는 조금 더 오래 생각했다. 더 이상 거슬리는 부분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러나 그 기준은 늘 조금씩 달라진다고 했다. 완성이라 여겼던 작품도 다시 보면 미완성처럼 보일 때가 있으니까. 어쩌면 그렇기에 그녀의 작업은 끝나지 않고 계속 자라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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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 빛을 머금는 순간 | 유리편집 김은주
김은주 작가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편집하는 사람이었다. 잡지사에서 긴 시간 편집자로, 편집장으로 살았다. 무언가를 배우는 걸 좋아해서 취미수집가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유리만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차갑고 위험했으니까. 그런데 편집 일을 그만두고 힘든 시기를 지나던 어느 날, 차갑고 위험한 그 유리가 가마에서 나오면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걸 알게 됐다. 불을 만나 일순간 온화해지는 그 변신이 결정적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첫 전시의 제목은 '유리편집'이었다. 오랫동안 편집자로 살아온 이가 이제는 유리를 편집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 이름 안에 그녀의 전환이 모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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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유리를 잘라 형태를 만들고 색유리를 조합해 가마에 굽는다. 한번 가마에 들어간 유리는 손으로 컨트롤할 수 없다. 그 기다림 끝에 나온 것들은 열에 의해 온기가 깃든 사물이 되어 나온다. "가끔은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기도 해요." 예상 밖의 결과를 즐기는 편이라 의도대로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가마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 자체가 작업의 매력이라고.
완성된 작품 안에는 달, 이슬, 새, 계절의 빛이 담긴다. 스케치 대신 단어로 남겨두었다가 작업하는 방식이라, 일상의 어떤 순간이 오래 마음에 걸리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작업으로 이어진다. 그릇이든 오브제든 곁에 두고 쓰고 바라보며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 빛이 닿아 아주 잠깐이라도 누군가에게 위로나 설렘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마음. 스스로를 순간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답게, 서촌의 석양을 기다려 관람하듯 바라보는 것도 그녀의 하루 중 하나다. "사그라드는 빛, 저무는 빛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볼 때마다 감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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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리넨이 있는 집이 생겼대
라마홈이 대로변에 처음 문을 열던 즈음, 김은주 작가는 근처 갤러리 우물에서 첫 전시를 하고 있었다.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지인들이 안부를 물으러 온 자리에 가까웠다. 퇴직 후 첫 인사 같기도 했고, 스스로는 조금 "이상한 결혼식" 같았다고 표현했다.
그날 전시를 찾은 친구 하나가 전시 얘기와 함께 다른 말도 꺼냈다. "동네에 리투아니아 리넨 있는 집이 생겼더라." 에디터 특유의 레이더였다. 이탈리아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리투아니아 리넨이라니.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고, 라마홈에서 천을 만지고 옷을 살피며 한참을 머물렀다.
나중에 라마홈 이하나 대표는 그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그때 사실 굉장한 응원을 받는 느낌이었어요." 비슷한 시기에 각자의 첫걸음을 뗀 두 사람은 그렇게 서촌의 이웃이 됐다. 전시 포스터를 한 아름 가져가 숍 한편에 올려두고, 오는 사람마다 위에 유리 전시가 있다고 소개하는 사이. 서로의 시작을 곁에서 지켜본 시간이 쌓이면서, 지금은 그 무엇으로도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애틋함이 되었다.
오수 작가가 라마홈을 처음 알게 된 것도 같은 해 2019년이었다. 서촌에 막 자리를 잡던 시절, 전시장과 집을 오가던 큰길가에 라마홈이 있었다. 호기심에 처음 들어섰다가 사장님의 다정함 덕분에 점점 더 자주 찾게 됐다. 옷도 예뻤고 곳곳에 놓인 오브제와 책들도 좋았다. 그때 이미 이끼 작업을 하고 있던 오수 작가가 코스터를 가져왔을 때, 이하나 대표는 한눈에 반했다. 그렇게 오수 작가의 작품도 라마홈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숍 한편에는 이끼 코스터 옆에 오수 작가가 선물한 돌에 낀 이끼가 나란히 놓여 있다. 만들어진 것과 자라난 것이 경계 없이 함께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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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생긴 작업 친구
두 작가가 서로를 알게 된 건 에디터 선배의 소개였다. 오수 작가가 김은주 작가의 두 번째 전시를 찾아간 날, 김은주 작가는 글을 쓰는 일도 함께 하고 있었다. 오수 작가의 인터뷰를 쓰면서 둘은 한층 더 가까워졌고, 그다음은 동네가 했다. 둘 다 줄곧 서촌 안에 있었으니, 약속하지 않아도 오다 가다 마주치는 일이 늘 있었다. 만남이 잦아질수록 나눌 수 있는 이야기도 깊어졌다.
김은주 작가에게 오수 작가는 처음 생긴 작업 친구다. "만나면 자연스럽게 작업 얘기를 하게 되고, 흘려버릴 얘기도 하고, 담아야 될 얘기도 생기고. 필터 없이 나눌 수 있어서 진짜 편하고 좋았던 것 같아요." 오래된 친구들과는 작업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는데, 오수 작가와는 우연히 만나 밥을 먹든 차를 마시든 작업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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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 작가에게도 김은주 작가는 그런 사람이다. 결정적인 한순간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가까이 살며 가족보다 더 자주 만나는 환경이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묶었다. 무엇보다 성격이 잘 맞아서, 그렇게 자주 봐도 질리지 않고 또 보고 싶어진다고 했다. "작가님의 느리고 호수 같은 리액션을 너무나 좋아해요." 부러운 점을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작가님 작업실에 가면 어떤 서랍을 열어도 작품으로 꽉 차 있어요. 전시로 서랍을 다 비우게 되더라도 금방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성실함과 능력, 그게 늘 부럽고 멋져요." 나이 차이도 있고 살아온 방식도 달랐지만, 어느 순간 두 사람은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하나 대표는 두 사람과 함께하며 공예를 향한 마음이 열렸다고 한다. "작가의 작품으로만 볼 게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 중요하구나. 따뜻한 두 분과의 관계에서 많이 배우면서 시작을 했던 것 같아요." 김은주 작가는 그 감정을 '애틋함'이라 불렀다. 조금 간지러운 단어이긴 하지만, 세 사람은 서로를 그렇게 말한다. 많이 애틋하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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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웃이란
좋은 이웃의 기준을 물었을 때, 세 사람의 대답은 조금씩 달랐지만 어딘가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오수 작가는 말했다. "봤을 때 웃음이 나면, 그게 이웃이 된 것 같아요." 가벼운 말 같지만 그 안에는 많은 애정이 들어 있었다. 김은주 작가는 조금 더 천천히 생각했다. 엄청난 왕래가 있어야만 좋은 이웃인 건 아니라고. 이웃이 골목 담벼락에 심어둔 식물들, 그걸 가장 오래 바라보는 사람은 작업실에 늘 있는 자신이라는 것. 내가 살고 있을 뿐인데 그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풍경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러고는 조금 웃으며 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주차 딱지를 열 개 넘게 받으며 울고 있던 자신에게 통장님이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도와줬던 일. "설명도 없이, 인사도 없이 그냥 바로 도와주는 그게 서촌에는 아직 남아 있어요."
이하나 대표에게 이웃은 힘들 때 찾게 되고,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 세 사람이 서촌에서 만들어온 관계가 그랬다. 김은주 작가는 그 거리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느슨한 관계이면서도 각별한 마음이 늘 마음 한편에 있어요. 지붕이 큰 가족 같은 느낌." 계획한 적 없는데, 어느새 이 동네 없이는 상상이 안 되는 삶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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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홈에서 만나요
오수 작가의 이끼 코스터와 이끼돌, 김은주 작가의 유리 작품은 지금 라마홈에서 만날 수 있다. 이끼 곁에 유리가 있고, 유리 곁에 리넨이 있다. 손으로 만든 것들, 자연에서 온 것들, 오래 곁에 두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한 공간에 나란히 놓여 있다.
이 글을 읽고 숍에 들르게 된다면, 유리와 이끼 곁에 잠깐 머물러보시길. 이끼는 오래 들여다볼수록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고, 유리는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매번 다르게 반짝인다. 오수 작가가 콘크리트 틈에서 건져 올린 것과, 김은주 작가가 불 앞에서 기다려 만들어낸 것이, 그 자리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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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저도 무언가를 배웠습니다. 좋은 이웃이란 대단한 왕래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 내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풍경이 되고, 어떤 관계는 계획하지 않아도 같은 동네를 함께 지나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깊어진다는 것.
이끼는 낮고 조용한 곳에 붙어 느리게, 그러나 아주 오래 자랍니다. 유리는 빛을 만나는 순간 찬란해지고요. 라마홈에 나란히 놓인 두 작업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오래 곁에 두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서촌에서의 인연도, 라마홈에서의 시간도, 그렇게 천천히 쌓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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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ahome letter no.7
interview 김민하
photo 천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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