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의 작업실 | 도예가 백경원
서촌 골목 어딘가에서 벚꽃이 지고 있을 시간, 이 편지를 씁니다.
챙겨야 할 것들, 시작해야 할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벚꽃은 절반쯤 져 있고, 그제야 아, 봄이구나 싶은 계절입니다. 짧게 피었다 흩어지는 꽃잎처럼, 봄은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라마홈도 그 봄의 속도에 맞춰, 새 계절에 맞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며 매일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자꾸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같은 동네 안에서 조용히 흙을 빚는 사람. 처음엔 손님으로 만났고, 오며가며 눈인사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작업을 말없이 알게 된 이웃.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마음이 오래됐는데, 봄이 되어서야 겨우 자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손으로만 흙을 올리는 사람, 도예가 백경원 작가를 청운동 작업실에서 만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늘 만들던 그녀의 손이 결국 흙 앞에 앉게 된 이야기, 덴마크에서 보낸 비움의 6개월, 따개비처럼 서로 붙어 자라는 것들에 대하여. 그 손끝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이제 건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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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쌓는 시간
도예가 백경원
서촌의 골목에는 소리보다 냄새가 먼저 오는 시간이 있다. 점심 무렵, 어느 작업실 문틈으로 은근히 스며드는 흙 냄새. 가마에서 막 꺼낸 것들이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손은 이미 다음 형태를 찾아 움직이고 있다. 기계 없이, 손으로만 흙을 올리는 사람. 라마홈이 처음 서촌에 자리를 잡던 무렵부터, 백경원 작가는 이미 같은 동네에서 흙을 빚고 있었다.
추석 선물을 사러 들렀다가 이웃이 되었고, 어느덧 4년 가까이 작품을 소개해온 사이가 되었다.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찬찬히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기에 더욱 궁금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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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닿는 곳마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의 그녀는 문방구에서 파는 한지를 꼬아 장미를 만들었다. 부모님 결혼기념일 카드에 붙여 드리려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해보니 됐고, 되니까 기뻤다. 레고를 쌓을 때도 혼자 한쪽에서 색을 맞추며 무언가를 만들었고, 인형 놀이를 해도 인형보다 머리 부분 하나에 한참을 집중했다. 만들어 나가면서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가는 시간, 그 집중의 감각이 좋았다고 그녀는 말한다.
대학에서 금속 공예와 도자 중 하나를 골라야 했을 때, 결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톱질을 한 번 해보고 이 길은 아니다 싶었다. 흙은 달랐다. 딱 떨어지지 않아도 됐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물성이 나하고 잘 맞겠다 싶어서 선택했는데, 대단히 뭔가를 알고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그렇게 그녀와 흙의 인연은 시작됐다. 운명처럼, 혹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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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빌딩, 흙이 나를 선택하기까지
학부 시절 내내 작업이 즐겁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에는 분명한 미감이 있었고, 그 안에 자신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다. 2, 3학년의 시간은 마치 가방만 들고 학교를 오간 날들처럼 흐릿하게 지나갔다. 그러다 4학년이 되어서야 핸드빌딩을 만났다. 그때 비로소, 작업이 재미있어졌다고 그녀는 말한다.
기계 없이 손으로 직접 흙을 쌓아 올리는 방식. 예민하고 섬세한 작업이다. 조금만 힘이 달라져도 형태가 틀어지고, 손끝의 감각이 곧 작품이 된다. 만들고 싶은 형태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기법에 닿게 됐다고 했다. "작업할 때 많이 바꿔가면서 해요.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하면서. 핸드빌딩이 그런 즉흥적인 작업 성격에 제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손이 먼저 알고, 생각이 나중에 따라오는 방식. 그녀에게 흙은 그렇게 다가왔다.
대학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녀는 오래 자기만의 방향을 찾아가고 있었다. 비슷한 작업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무엇을 향해 가야 할지 아직 분명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많이 외로웠던 것 같아요. 무엇을 추구해야 될지 잘 모르겠고, 내 것도 없고." 그래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흙 앞에 앉는 시간을 쌓다 보니 자기 것이 조금씩 분명해졌고, 그 고요했던 시간들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줬다는 걸, 이제는 안다. 지금은 그 학교에서 후배들에게 손성형 기법을 가르치고 있다. 한때 혼자 외롭게 걸었던 그 길을, 이제는 함께 걷는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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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어 있던 시간, 덴마크
2014년, 그녀는 덴마크의 한 레지던시로 떠났다. 작가들이 일정 기간 한 공간에 머물며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 오래된 저택을 개조한 그곳에서 각국의 작가들과 함께 살았다. 처음엔 언어가 막막했다. 말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느끼는 고독은 생각보다 깊었지만, 그 고독이 오히려 그녀를 더 안쪽으로 데려갔다.
매일 저녁을 돌아가며 차리고, 낯선 재료로 요리하고, 서로 다른 나라의 음식을 맛보는 일상이 쌓였다. 쉬는 날에는 자전거를 타고 카놀라 밭 사이를 달렸고, 해변에서 혼자 바다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다. 거창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가 조용히 지나갔다. "그런 시간들이 쌓였는데, 언제 또 그렇게 해보겠어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비어 있던 때였다고, 그녀는 말한다. 비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채울 수 있었던 시간.
그전까지는 학교 안에서만 작업을 봐왔다. 덴마크에서 처음으로 전혀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흙을 다루는 걸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 그것은 작은 균열이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조금씩 흔들리면서, 자기 작업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제대로 물어볼 수 있게 됐다. 그때 만든 작업들이 지금도 작업실 한켠에 있다. 가마에서 나올 때마다 달랐던 그 예측 불가능한 빛과 색들을, 그녀는 여전히 곁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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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어서 담을 수 있는 것들
그녀의 작업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두께다. 얇고, 부드럽고, 손이 닿는 면이 정직하다. 컵 윗부분, 입술이 처음 닿는 그 테두리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고 했다. "입도 닿지만 눈에 제일 먼저 가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얇으면서도 부드럽게 처리하려고 애를 많이 써요." 초기에는 얇게 만들어야 잘 하는 거라고 믿었다. 지금은 그 기준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 자리를 향한 마음만큼은 그대로다.
그녀가 그릇을 좋아하는 이유도 결국 같은 데서 온다. "그릇이 어떤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담기 위한 것이기 전에,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공간. 비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생기는 형태. 그 감각이, 그녀가 오래 흙 앞에 앉아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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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 Bouquet-Reconciliation> . 사진 조원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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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뿔이라는 형태
그녀의 작업에 원뿔이 자주 등장한다. 뒤집으면 다른 형태가 되고, 기둥과 만나면 또 다른 표정이 나온다. 의미를 담기보다 가능성을 실험하는 형태다. 원뿔만으로 이루어진 작업이 본격화된 건 2020년이었다. 목포 해양유물전시관 전시에서,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도자기들에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뒤엉킨 유물들을 마주했다. 전시 기획자가 그 장면이 그녀의 작업을 떠올리게 했다고 했고, 거기서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됐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 같기도 하고, 따개비들이 서로 붙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그녀 안으로 들어와 뭉쳐지면, 그걸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집약해 작업으로 내놓는다고 했다. 설명하기보다 보여주는 방식, 말하기보다 만들어내는 방식. 원뿔은 그 과정에서 그녀가 가장 오래 붙들어온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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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임정현 . 텍스타일 백아란 . 가구 백남언 . 도자기 백경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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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ding&Building
본딩앤빌딩(Bonding & Building).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Bonding과 무언가를 짓는다는 Building, 그리고 셋의 성(姓)에서 따온 B까지. 세 가지 의미가 자연스럽게 겹치는 자리에서 태어난 이름이다. 백경원 작가와 목공을 하는 동생, 백남언. 그리고 뉴욕에서 30년 가까이 살다 한국에 돌아온 니트 디자이너 사촌 언니, 백아란. 서로 다른 재료와 방식으로 작업하는 세 사람이 매년 공예 트렌드 페어에 함께 나간다. 도자, 목공, 니트가 한 공간에 어우러지는 자리다.
스스로를 대체로는 좋은 누나라고 생각하지만, 못되게 굴 때도 많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을 함께 하면서 사이가 조금 더 좋아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스위스 칼로 무언가를 깎아 만들어 주셨고, 어머니는 미술을 전공했다. 만들기를 좋아하게 된 건 어쩌면 그 집안에 오래도록 흐르던 공기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공기는 지금, 이 세 사람에게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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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감각
처음에는 서촌이 목적지는 아니었다. 조용하고 괜찮은 동네라 한 번 와보자 했던 것이, 자리가 맞아 자연스레 눌러앉게 되었다고 했다.그렇게 머물게 된 골목에서, 늘 희망 같은 것을 품게 되는 3월의 이름으로 작업실을 열었다. 삼월의 작업실. 그리고 서촌에서 라마홈을 만났다. 추석 선물을 사러 들렀다가,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다가,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작업을 알아보는 이웃이 되었다. 어떤 인연은 그렇게, 동네가 먼저 만들어준다.
그 인연이 이제 조금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 라마홈의 의류 브랜드 낸시앤아스테리아 (Nancy & Asteria) 는 4월부터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외부 작가와의 협업을 시작한다. 첫 번째 파트너는 백경원 작가다. 흙과 패브릭, 전혀 다른 재료를 다루지만 오며가며 서로의 작업을 지켜봐 온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이 쌓여 자연스럽게 이어진 인연이다. 다른 듯 어딘가 닮은 도자기와 옷이 만나 어떤 장면을 만들어낼지, 라마홈도 그 장면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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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어지지 않는 삶
앞으로의 삶에 대해 묻자 그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고 싶어요. 늘 흥미로운 것들을 향해 걸어가면서,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줄 수 있는 방식으로." 한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고 하자 손을 저었다. "하나를 계속하는 건 게을러서 그런 거예요. 다른 길이 없기도 하고, 이게 제일 쉬워서." 겸손이라기보다 정직이었다. 그리고 그 정직함 안에 오히려 단단한 무언가가 있었다.
좀 더 자유롭게 하고 싶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작업이 항상 어떤 반듯함을 가져야 한다고 추구해 왔는데, 거기서 한 번쯤 흐트러져 보고 싶다고. 굳어지는 게 싫다고. 변덕이 심한 성격이라 작업을 조금씩 다르게 하려는 것 같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조용히 해석했다. 그 말이 인터뷰 내내 가장 솔직하게 들렸고, 가장 오래 남았다. 손으로 흙을 올리는 일을 오래 해온 사람이 정작 가장 원하는 건, 그 손이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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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손이 먼저 알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두께가 맞는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언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도예가, 백경원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라마홈이 천을 고르고 옷을 만들어온 시간과 어딘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전에 손이 먼저 알고 있는 것들. 그것이 결국 오래 남는 것들을 만든다고, 우리는 조용히 믿고 있습니다.
이 봄이, 당신에게도 손이 먼저 알고 있는 무언가를 찾는 계절이 되기를 바라며.
손의 시간을 담은 편지와 함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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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ahome letter no.6
interview 김민하
photo 천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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