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치과 | 송현주 원장님
긴 여름방학을 마치고, 라마홈이 다시 문을 엽니다.
아직 한낮에는 여름의 온기가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스치는 바람에서는 어느새 가을이 느껴집니다. 괜스레 평소보다 조금 먼 길로 돌아가고 싶은, 걷기 좋은 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맘때면 특별한 목적지가 없어도 종종 걷고 싶어집니다. 생각이 많은 날에도, 잠시 마음을 쉬게 하고 싶은 날에도 길을 나섭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걷다 보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은 조금씩 가라앉고, 평소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이 하나둘 눈에 들어옵니다.
하늘치과 송현주 원장님에게도 서촌은 그렇게 걸으며 가까워진 동네였습니다. 점심시간에 잠깐 걷기 시작한 길이 어느새 궁궐과 오래된 나무를 만나고, 좋아하는 가게와 반가운 이웃을 만나는 길이 되었습니다. 라마홈의 가을 첫 편지에서는 원장님이 걸어온 서촌의 길과, 그 길에서 만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눠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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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날의 산책
하늘치과 | 손현주 원장님
송현주 원장님이 서촌에서 하늘치과를 연 것은 2012년이었다. 결혼 후 세검정에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 동네와 가까워졌고, 아이가 자라면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일터를 두고 싶어 서촌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한 곳에서 14년을 일하다 보니 서촌의 길도 어느새 익숙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매일 오가던 길을 산책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점심을 먹고 병원으로 돌아오다 보면 어쩐지 그대로 들어가기 아쉬운 날이 많았다. “조금만 더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녁에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있었기에, 원장님은 대신 하루의 가운데에 작은 틈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점심시간을 30분 늘리고 밥을 조금 일찍 먹은 뒤, 남은 시간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치과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정도였다. 그러다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경복궁까지 걸었고, 어느새 걸음은 더 멀리 이어졌다. 어떤 날에는 창경궁까지 부지런히 걸어가 궁궐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돌아오는 길에는 버스를 탔다. 어디까지 걸어야 한다는 규칙도,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걸어와야 한다는 약속도 없었다. 그날 주어진 시간과 마음이 허락하는 만큼 걷는 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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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차분해지는 풍경
그렇게 조금씩 넓어진 산책길에는 자연스럽게 궁궐이 들어왔다. 원장님은 서촌에 오기 전부터 조선의 궁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궁궐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곤 했는데, 서촌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책 속에서 보던 장소들이 어느새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경복궁에서 시작한 걸음은 창덕궁과 창경궁, 덕수궁으로 이어졌고, 조금 더 자유롭게 궁궐을 드나들고 싶어 문화유산 후원에도 참여했다.
“하루에 10분만 돌아도 좋아요. 예전에는 비 오는 날 가면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런 날이 참 좋았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곳은 창경궁이었다. 봄이면 꽃을 보러 찾았고, 얼마 전에는 종묘의 오래된 나무들 사이를 걸었다. “딱 들어가면 마음이 차분해져요.” 사람과 함께 걷는 것도 좋아하지만, 혼자일 때는 풍경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고 했다. 나무와 건물,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길의 모습을 하나씩 바라보며 걷다 보면 머릿속에 머물던 생각도 자연스레 가라앉았다.
그래서 원장님에게 산책은 생각을 정리하려 애쓰는 시간이라기보다, 눈앞의 풍경을 따라 걷는 동안 마음도 자연스럽게 정돈되는 시간에 가까웠다. 어디를 향해 걷느냐보다 그날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길을 지나느냐가 더 중요했기에, 같은 목적지를 두고도 꼭 같은 길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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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느 길로 돌아갈까
퇴근길에도 종종 걸었다. 치과에서 세검정의 집까지는 천천히 걸어 한 시간 남짓. 어떤 날에는 환기미술관을 지나고, 조금 높은 곳에서 풍경을 보고 싶은 날에는 부암동 언덕으로 향했다. 봄이나 초여름에는 수성동계곡에서 산길을 따라 부암동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어느 길로 돌아갈지는 그날의 날씨와 마음이 정했다.
때로는 남편이 좋은 산책 메이트가 되어주기도 한다. 미디어 아티스트인 이경호 작가님의 스튜디오는 경복궁 건춘문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두 사람은 함께 경복궁을 따라 걷다가 각자의 일터로 향해야 할 때면 서로 다른 길로 갈라진다.
원장님은 서촌으로 이어지는 영추문 쪽으로, 이경호 작가님은 북촌으로 향하는 건춘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동안 같은 풍경을 나란히 바라보며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길로 향하는 것. 서로의 하루를 함께 걸어주는 두 사람만의 산책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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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주 걷다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도 만났다. 눈이 많이 내렸던 어느 겨울날에는 차가 꼼짝하지 않아 사람들이 자하문터널을 줄지어 걸었다. 평소에는 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던 터널을 수많은 사람이 함께 걷는 모습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기억에 남았다.
조금 더 소소한 우연도 있었다. 광화문 근처에서 치과를 운영하는 대학 동기와 점심 산책을 하다 몇 번이나 마주친 것이다. 서로 산책 시간을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걷다가 만나서 ‘안녕’ 하는 거예요.” 각자의 일터에서 나와 걷던 두 사람이 광화문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누고 다시 제 갈 길로 향했다. 평범한 하루 사이에 불쑥 들어온 이런 장면들은 걷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작은 재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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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위해 남겨둔 시간
점심시간에 처음 만들어두었던 30분은 어느새 원장님이 하루를 살아가는 방식과도 이어져 있었다. 하늘치과에는 지금 두 개의 진료대가 있다. 처음에는 세 개였지만 하나를 줄였고, 토요일 진료도 조금씩 줄여 지금은 한 달에 두 번 정도만 하고 있다. 일을 적게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오래 하고 싶어서 내린 선택이었다.
“가늘고 길게 가고 싶어요.”
예전에는 일주일에 닷새를 꼬박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씩 일하는 시간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비워 낸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다른 일상이 들어왔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생겼고, 혼자 밥을 먹은 뒤 동네를 한 바퀴 돌 여유도 생겼다. 때로는 금요일에 좋아하는 동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산책을 시작했다. 원장님은 그런 시간을 "나에게 주는 선물 같다"고 했다.
무언가를 더 많이 해내기 위해 하루를 채우기보다, 좋아하는 것을 누릴 수 있을 만큼의 자리를 남겨두는 것. 점심시간에 더해진 30분은 그렇게 원장님이 자신의 시간을 대하는 방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따라 걷던 어느 날, 오래 바라보기만 했던 가게와의 인연도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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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을 지나기만 했던 가게
예전 라마홈 매장이 있던 시절, 원장님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조금 신비하고 예쁜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궁금한 마음은 있었지만 낯선 가게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어색해 선뜻 문을 열지는 못했다. 라마홈은 한동안 그렇게 산책길에서 바라보고 지나치는 곳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에서 내려 병원으로 걸어가던 길에 누군가 말을 걸었다. “오늘 좀 춥죠?” 라마홈의 이하나 대표였다. 원장님은 가게 앞을 오가며 얼굴을 보았기에 이하나 대표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하나 대표는 원장님을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신을 아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몇 마디를 나누고 보니 그저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된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건넨 인사였다.
두 사람은 신교동에서부터 한동안 나란히 걸었다. 날씨 이야기를 비롯해 소소한 말을 주고받다가 한 사람은 가게로, 한 사람은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 되게 다정한 분이구나 생각했어요. 모르는 사람하고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구나.”
그 짧은 대화가 라마홈을 조금 다르게 보게 했다. 오랫동안 밖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가게 안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를 알게 되었고, 얼마 뒤 원장님은 마침내 그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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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세 식구의 옷장에
라마홈에서 처음 마음이 간 것은 리넨 스카프였다. 손에 닿는 리넨의 감촉이 좋았고, 편안하게 오래 두고 쓸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스카프에서 시작된 관심은 자연스럽게 옷으로 이어졌다. 하나둘 입어보니 자주 손이 갔고,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할 때면 가족에게도 함께 입혀보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의 옷을 고르러 갔다가 남편의 옷을 함께 고르고, 어느새 아들의 옷까지 하나둘 늘어났다. 한 사람의 취향에서 시작된 라마홈의 옷이 세 식구의 일상에 조금씩 스며든 셈이다. 봄이 오면 원장님은 좋아하는 블루종을 꺼내 입고, 남편은 중요한 날이면 남색 리넨 롱코트를 찾는다. 대학생이 된 아들에게도 즐겨 입는 울코트가 생겼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높은 이경호 작가님과 함께 살면서 오래 입고, 다시 사용하고, 물건을 쉽게 버리지 않는 라마홈의 태도에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라마홈을 찾게 하는 것은 옷만이 아니었다. 가게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며 동네 사람을 알게 되었고, 한 사람과의 인연이 또 다른 사람과 공간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알게 된 얼굴을 어느 날 다시 동네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원장님은 라마홈을 두고 “라마홈은 동네 사랑방 같은 느낌이 있어요”라고 했다. 물건을 고르러 들어갔다가 누군가의 안부를 듣고, 새로운 이웃을 알게 되고, 그 인연을 따라 동네가 조금씩 넓어지는 곳. 처음에는 문을 열기도 망설였던 가게가 어느새 일상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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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머물기를
그렇게 시작된 라마홈과의 인연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가게가 쉽지 않은 시간을 지날 때에도 원장님은 꾸준히 라마홈을 찾았다. 좋아하는 가게가 이 동네에서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이하나 대표에게도 그 마음은 큰 응원으로 남았다.
“오래오래 자리 잡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처음에는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아 들어선 가게였지만, 오가는 시간이 쌓이면서 그곳에 있는 사람의 안부도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가게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고, 동네에서 다시 마주치고, 서로의 시간을 지켜보는 사이 라마홈은 어느새 원장님에게 오래 곁에 있었으면 하는 이웃이 되어 있었다.
그 마음은 원장님이 자신의 치과를 이야기할 때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2012년부터 같은 자리에서 환자를 만나온 원장님 역시 하늘치과를 오래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하는 일은 달라도 한자리에서 좋아하는 일을 오래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서로가 계속 이 동네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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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가까워진 동네
처음부터 서촌이 원장님의 동네였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일하며 수없이 같은 길을 걸었다. 그 사이 일곱 살이던 아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낯설었던 골목에는 혼자 들어가도 편안한 식당과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 수 있는 가게가 생겼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눌 얼굴도 하나둘 늘어났다. 그렇게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원장님은 서촌에서는 사람도 가게도 천천히 자리를 잡는 것 같다고 했다. 관계가 만들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한번 맺어진 인연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돌아보면 원장님에게 서촌은 어느 날 갑자기 좋아하게 된 동네라기보다 매일의 시간이 조금씩 쌓여 만들어진 곳에 가까웠다.
그 시작에는 하루에 더해 둔 30분이 있었다. 그 시간을 따라 궁궐의 오래된 나무를 만났고, 계절마다 다른 길을 발견했다. 걷다가 친구와 우연히 마주쳤고, 한때는 문밖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가게의 주인과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한 걸음씩 걷는 동안 낯설었던 동네에는 좋아하는 풍경과 사람이 하나씩 늘어났다.
산책은 멀리 가기 위한 일이 아니었다. 익숙한 곳을 천천히 바라보며 그 안에서 마음이 가는 것들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발견한 것들이 오래 곁에 머물기를 바라게 될 때, 어느새 그곳은 한 사람의 동네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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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가늘고 길게’라는 원장님의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자신의 일을 오래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과 좋아하는 가게가 오래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어쩌면 둘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길도 오래 걷다 보면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생깁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무를 알아보게 되고, 늘 지나치던 가게에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을 보내는 사이 반가운 곳이 생기고, 안부가 궁금한 사람도 하나둘 늘어납니다.
원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산책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익숙해서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발견해 가는 일. 그렇게 걷고 또 걷는 사이, 어느새 한 동네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 말입니다.
이번 주에는 평소보다 조금 먼 길로 돌아가 보아도 좋겠습니다. 그러다 좋아하는 나무 한 그루, 오래 머물렀으면 하는 가게 하나, 반갑게 인사를 건넬 사람 하나를 만나게 된다면 그날의 산책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다음 이야기도,
그렇게 걷다 우연히 만난 좋은 것들에서
다시 시작되기를 바라봅니다. 가을의 좋은 바람을 오래 누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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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ahome letter no.8
interview 김민하
photo 천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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