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공기는 조금 느리고, 말을 아끼게 됩니다. 하루를 서두르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가만히 되짚게 되는 계절. 라마홈의 편지도 그런 마음으로, 한 해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안부를 건넵니다. 지금의 일상은 어떤 온도로 머물러 있는지, 올 한 해는 어떤 장면들로 채워졌는지 묻는 마음으로요.
빠른 소식보다 느린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 새로움보다 오래 곁에 남는 풍경을 기록하고 싶어서 한 호씩 이어오다 보니 어느덧 네 번째 편지가 되었습니다.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은 것은, 삶의 속도와 선택의 결을 들여다보려는 이 편지의 시선이었습니다.
영전 님과 아드레아 님의 이야기는 서촌의 한옥 두 채를 하나의 집으로 이어 살아가는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불편함을 피하기보다 시간을 함께 견디고, 집과 물건을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그 결은 라마홈과의 인연처럼 말보다 촉감이 먼저 닿고, 새로움보다 오래 곁에 남는 것을 택하는 삶의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네 번째 편지는 누군가의 집을 그리기보다, 공간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리듬을 따라가보려 합니다. 빛이 머무는 방향을 살피고,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집의 표정을 기록하며, 오래된 것에 남는 온기를 조심스럽게 건넵니다. 연말의 조용한 시간 속에서, 이 이야기가 여러분의 하루에도 잠시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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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두 채의 사이에서, 빛이 살고 아이가 자란다
서촌에서 만난 영전 · 아드레아 님
서촌에 오래 머문 사람들의 집은 대개 ‘집’보다 먼저 ‘길’로 기억된다. 어느 날은 테라스를 통해 산이 먼저 다가오고, 어느 날은 살구나무의 꽃이 먼저 문을 열어준다. 영전과 아드레아가 서촌에 들어온 순간도 그랬다. 계획보다 우연이 앞섰고, 조건보다 풍경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집을 ‘안’에서 고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밖에서부터, 빛과 나무와 골목의 기척으로부터, 이미 마음이 결정되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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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 · 아드레아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만난 두 사람은 각자의 일을 시작한 뒤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영전은 서울로, 아드레아는 송도로 출근하며 현실적인 거리와 시간을 계산해야 했지만, 그 계산의 끝에서 서촌은 늘 '발길 닿는 동네'로만 남아 있었다. 집을 구할 때도 서촌은 선택지에 없었다. 합정과 부천처럼 중간 지점을 떠올리며, 출퇴근이 가능한 동네를 찾고 있었기에.
그러다 어느 날, 늘 데이트하러 오던 서촌에서 "그냥 부동산에 한번 들어가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본 첫 집에는 큰 테라스가 있었고, 인왕산이 바로 보였다. 집 안보다 바깥의 풍경이 말을 걸었다. 아드레아는 고민하지 않았다. "여기다." 출퇴근은 불편해질 테지만, 회사와 물리적으로 떨어진다는 감각이 오히려 마음을 설득했다. 그렇게 서촌은 '조건을 맞춘 동네'가 아니라, '살기로 선택한 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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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보다 먼저 도착한 집
지금의 집은 한옥 두 채가 이어진 구조다. 원래는 한 집이었지만, 예전에 방을 나눠 세를 주던 흔적이 남아 현관이 두 개고 계량기도 분리돼 있었다. 이사 당시에는 큰 수리를 하지 않은 상태였고, 두 사람은 그 집에서 1년쯤을 먼저 살아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기둥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뜯어보니 바깥쪽 기둥은 비를 맞아 삭아 있었다. 낮은 주춧돌은 오랜 시간 물을 머금고 있었다. 한옥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었다.
6개월이면 될 거라던 공사는 가을 장마와 함께 길어졌다. 9월 내내 비가 내려 구조 공사가 멈췄고, 땅을 파면 예상치 못한 큰 돌이 나왔다. 겨울이 오면 콘크리트를 다루기 어려워져, 바닥에 놓을 돌은 규격이 맞지 않아 다시 잘라야 했다. 아이들과 함께 '6개월만 살 집'을 어렵게 구해 지냈지만, 일정은 계속 늘어났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그 시간을 힘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밌었다"고, "많이 배웠다"고 말한다. 한옥을 고친다는 것은 집을 새로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시간과 협상하는 법을 배우는 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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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시간을 알려주는 방식
계절이 느껴지는 집. 눈 오는 날은 유독 고요하며, 비가 오는 날에는 소리가 커진다. 처음 한옥에서 잠들던 날, 아드레아는 밤에 들리는 빗소리가 낯설었다. 아파트에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한옥에서는 집 전체로 퍼져 들렸다. 우산이 바닥을 치는 소리, 골목을 걷는 발소리까지도. 이제는 그 소리가 이곳만의 리듬이 되었다.
겨울에는 해가 늦게 뜬다. 문을 열어두고 있으면 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봄에는 살구꽃이 피고, 꽃이 지면 살구를 수확한다. 시계보다 빛이 먼저 하루를 알려준다.
이 집에서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풍경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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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집에 적응하는 법
이 둘의 집은 아이들에게 ‘친절한 집’이라고 부르기엔 안전장치가 많지 않다. 하지만 영전과 아드레아는 아이들에게 맞춰 집을 바꾸기보다, 아이들이 집에 적응하도록 두었다. 첫째는 지붕에 올라가 놀고, 기와를 타다 바지에 구멍이 난다. 테라스에서는 물놀이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작은 풀장을 펼친다.
층간 소음에 대한 걱정이 적어 아이들은 집 안에서 마음껏 움직인다. 음악을 틀고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며, 집은 때로 공연장이 된다. 이곳은 정리된 공간이기보다, 가족이 함께 만들어가는 생활의 무대다. 물건의 위치도, 공간의 쓰임도 아이들의 손을 거치며 계속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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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에서, 각자의 거리를 찾다
아드레아는 서촌을 이야기하다가, 문득 스페인에서의 시간을 떠올린다고 했다. 도시의 규모나 언어는 다르지만, 생활의 감각은 어딘가 닮아 있다고.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거리, 아이들이 골목을 몸으로 익히며 자라는 풍경, 일상이 삶의 중심에 놓이는 리듬. 서울이라는 이름 안에 있지만, 서촌에는 그런 '도시의 크기'가 남아 있다. 어디로 가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길을 아는 느낌,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기억하는 관계. 스페인에서 경험했던 삶의 호흡이, 전혀 다른 대륙의 골목에서 다시 이어진다.
영전에게 서촌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2017년부터 이곳을 살아온 그녀에게 서촌은 이제 '고향'에 가까운 동네가 되었다. 그 사이 서촌은 빠르게 변했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가게들이 있다. 골목과 불편한 교통, 어려운 주차 조건은 큰 자본의 속도를 늦추고, 가게들이 숨 쉴 시간을 만든다. 그래서 이 동네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바뀌지 않는다.
아이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서촌을 안다. 경복궁까지 이어지는 길을 모두 알고, 골목마다 단골 가게가 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오가며 얼굴을 아는 관계 속에서 자란다. 놀이터 대신 수성동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 경복궁이 마당이 되는 생활. 서울 안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크기의 삶이, 이 가족이 살아가는 서촌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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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홈, 좋은 이웃
라마홈과의 인연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시작됐다. 간판이 없어 열렸는지 닫혔는지 알기 어려웠고, 출퇴근 시간에는 문이 잘 맞지 않았다. 그래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린넨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용기 내어 문을 열었고, 그날의 기억은 물건보다 설명으로 남아 있다.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차분히 들려주던 이야기들.
이 집에는 ‘최고의 이불’이 있다. 원래는 영전의 블랭킷으로 산 것이었지만, 첫째가 만져보더니 그렇게 이름 붙였다. 저녁마다 아이는 “최고의 이불 어디 있어?” 하고 찾고, 여행에도 비행기에도 함께 간다. 바디 타월과 핫보틀, 가방들, 그리고 사계절 함께하는 옷들까지. 오래 쓰는 물건들은 이 집의 일상이 되었고, 그 일상은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되었다.
오래된 것에 대해
영전은 말한다. 처음부터 오래 쓰는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결국 좋아하는 것이 좁혀지고, 그 좋아하는 것을 오래 쓰는 쪽으로 삶이 정리되었다고. 집도 그렇다. 새것이 주는 설렘은 잠깐이지만, 오래된 집에는 시간이 쌓이며 생기는 이야기가 있다.
둘째를 봐주던 분이 어느 날 이 집이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집이었다고 말해주었을 때, 집은 단숨에 다른 깊이를 갖게 되었다. 물건도 마찬가지다. 구멍 난 바지를 고쳐 입으며 웃는 기억, 아이가 이름 붙인 이불, 가족 안에서 반복되는 농담들. 오래된 것은 낡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쌓여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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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 서촌 · 라마홈
인터뷰의 끝에서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집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곳”, 서촌은 “고향”, 라마홈은 “좋은 이웃”.
한옥 두 채 사이에서 빛은 오늘도 이동하고, 계절은 집 안으로 들어온다. 아이들의 소리가 자라며, 물건에는 시간이 묻어간다. 이 집은 완벽해지기보다 조금씩 더 ‘이 집다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야말로, 이 가족이 서촌에 오래 머물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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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즈음에는, 잠시 멈춰 서서 돌아보는 시간들이 더욱 간절합니다. 잘 해낸 일보다 오래 붙잡고 있었던 순간들, 새롭게 시작한 것보다 조용히 이어온 하루들. 그렇게 지나온 시간의 모양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어집니다.
영전과 아드레아의 집에는 그런 시간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빠르게 바뀌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공간, 불편함을 밀어내지 않고 생활로 받아들이는 선택, 그리고 매일의 반복 속에서 조금씩 자기 자리를 닮아가는 집. 그 풍경은 특별해서라기보다, 오래 바라볼수록 마음에 더 깊이 다가옵니다.
라마홈 편지 4호를 마치며, 올 한 해를 함께 건너와 주신 분들께 조용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매 계절의 사이에서 이 편지를 펼쳐 주신 마음 덕분에, 라마홈의 이야기도 네 번째 장을 이어 올 수 있었습니다. 크지 않은 기록들이지만, 누군가의 일상에 잠시 스며들 수 있었다면 좋겠습니다.
다가오는 시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하루를 쌓아가기를.
한 해의 끝에서 건네는 이 인사가, 새해를 맞이하는 작은 여백이 되기를 바라며.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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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ahome letter no.4
interview 김민하
photo 천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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