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스페이스 | 이윤선 님
며칠 사이 공기가 부쩍 차가워졌습니다. 효자로의 은행나무들도 노란빛을 띠기 시작해, 늘 오가던 길에서도 잎 사이로 번지는 색에 눈길이 머뭅니다. 아직 초록이 남은 가지를 바라보다 다음에 지날 때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를 헤아리며, 라마홈의 아홉 번째 편지를 준비합니다.
이번에는 모호 스페이스의 이윤선 님을 만납니다. 허브와 향을 다루고 텃밭을 돌보는 이웃을 떠올리니, 바람이 차가워지고 잎이 물드는 요즘에는 어떤 것을 느끼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익숙하게 알고 지내온 사이지만, 윤선 님의 하루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여행을 떠나서도 손수 만들어 쓰고 싶었던 비누에서 바질이 자라는 땅까지, 궁금한 것을 따라 걸어온 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찬 공기에 옷깃을 여미는 이맘때, 자신의 생활을 가꾸며 이웃과 나눌 것을 찾아온 윤선 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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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날들 속에서, 나를 알아차리는 일
모호스페이스 | 이윤선 님
그녀에게는 언젠가 한곳을 떠나 여기저기를 다니며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목욕을 좋아하고 몸에 쓰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여행 중에 필요한 것을 어떻게 구할지도 생각하게 되었다. 낯선 곳마다 익숙한 것을 찾아다니기보다 어디서든 손수 마련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직접 만들어 쓰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어디에서든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는 기술을 익히는 것. 그게 사실 모호의 시작이었어요.”
처음에는 자신이 쓸 비누를 만들었고, 몸에 바르는 것과 스프레이도 하나씩 더해졌다. 지내다 불편한 점이 생기거나 필요한 것이 떠오르면 다음 작업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먼저 살피는 것은 자신이 쓰고 싶은지다. 손이 가지 않는 것은 자연히 사라지고 자주 사용하는 것은 계속 다듬다 보니, 모호에서 이어지는 작업들이 그녀의 하루를 조금씩 들려주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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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고 배우며 나누는 일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권하기 전에 평소 어떻게 지내는지부터 묻는다. 차를 우려 마시는 동안 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준비가 번거롭게 느껴지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저마다 보내는 하루가 다르니 먼저 이야기를 듣고, 써본 뒤의 느낌까지 나누며 편안하게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간다.
그런 대화가 쌓여온 곳이 워크숍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모호를 꾸려가는 중심이 될 만큼 다양한 프로그램을 활발히 열었다. 간편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직접 만들고, 왜 이것이 필요한지까지 전하고 싶을 때에는 함께 알아볼 자리를 마련했다. 환경을 생각하는 이유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처럼 완성된 결과 하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재료를 다루는 동안 각자의 경험을 보태며 나누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스스로를 ‘전달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는 것을 건네더라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풀어낼지는 열어두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가르친다’는 표현을 조심하고,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돌아가서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나중에 들려오는 반응을 통해 자신도 새롭게 배우니, 그날 함께 만든 것을 쓰는 동안에도 대화는 이어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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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에서 흙으로, 흙과 초록 코뮨이티
궁금한 것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에센셜 오일로 만나던 바질을 차로 마시거나 음식으로 먹으면 어떨까 싶었고, 수입된 마른 잎과 농부에게 받은 생바질이 서로 다른 이유도 알고 싶었다. 자라는 환경을 알아보다 직접 길러보는 데 생각이 닿으면서, 농사를 지으며 살 땅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음에 맞는 자리를 구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흙을 만지고 싶은 마음을 계속 미뤄두기만 할 수는 없어, 우선 작은 규모로 시작하며 농사가 자신에게 맞는 일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약초를 키우려고 들어간 밭에서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 것은 그 아래의 흙이었다.
“약초가 중요한 게 아니라 흙에 있는 미생물이 너무 중요한 거예요.”
원하는 식물이 잘 자라려면 뿌리가 내리는 흙부터 돌볼 수 있어야 했다. 미생물을 공부하며 토양이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중에는, 익숙했던 것도 다시 보였다. 작고 고르지 않은 딸기를 처음에는 볼품없다고 여겼는데 생각해보니 어릴 때 먹던 것도 그만한 크기였다. 딸기가 이상한 것인지, 큰 열매에 익숙해진 눈이 먼저 판단한 것인지 돌아보게 된 셈이다.
사진을 찍기 어려워졌다는 말에서는 잠시 그 밭이 어떤 모습일지 떠올려보았다. 예전에는 새 잎이나 달라진 부분처럼 담고 싶은 대상이 분명했는데, 풀이 우거지고 여러 생물이 어울려 지내자 한곳만 떼어 보여주기 힘들어졌다고 했다. 커다란 거미나 갓 핀 꽃을 찍어도 그 안에 머물며 느끼는 것까지 한 장에 담기지는 않았을 테다. 사진을 보여주는 대신 밭에서 본 것을 들려주는 말에 오래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모호에서는 다른 이들도 흙을 경험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흙과 초록 코뮨이티’를 이어간다. 약초를 기르려고 얻은 밭에서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것을 배웠듯, 함께 만지고 지켜보는 동안 새롭게 알게 될 것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혼자 농사를 잘 짓는 데서 더 나아가 여러 사람이 모여 배우고, 언젠가는 안정적으로 머물 땅에서 함께 식물을 알아가는 자리를 꾸리고 싶다는 바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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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으로 그리는 한 장면
그렇게 하나를 알아가다 보면 처음의 생각이 달라지는 때도 있다. 가장 좋아하는 향을 물었을 때 하나만 고르기 어렵다고 했다. 분명 취향이 있었는데 오래 알아갈수록 저마다의 특징이 보여, 어느 쪽이 더 좋다고 쉽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향은 작은 움직임이 있는 장면을 떠올리는 데서 시작된다. 어두운 숲 사이로 사슴이 스쳐 간다면 울창한 나무를 보여주고 싶은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물에 눈길을 두고 싶은지에 따라 첫 재료를 정한다. 이후에는 낮인지 밤인지, 바람은 부는지, 땅은 얼마나 축축한지 헤아리며 풍경을 채워간다. 뒤편에 있어야 할 풀이 너무 도드라지면 다른 향으로 눌러 거리를 조절하고, 멀리 바라보는지 발밑을 내려다보는지에 맞춰 구성도 달라진다.
빛과 습도, 원근까지 표현하는 과정을 듣고 나니 후각 예술이라는 말이 한결 가깝게 느껴졌다. 앞으로 꼭 만들고 싶은 것을 물었을 때에도 ‘Mood spray‘로 전개하고 있는 조향을 계속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음에는 무엇에서 영감을 받을지 아직 모르지만,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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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시다” 하고 시작한 이웃
모호와 라마홈이 가까워진 것도 서로 좋아하는 것을 나누면서였다. 리넨과 허브라는 다른 재료를 다루지만, 자연 소재와 손으로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두 공간을 함께 찾아주곤 한다. 그 사이에서 사람을 소개하고 관심사를 나누다 코로나 무렵에는 여러 일을 함께 벌였다.
그때 무엇을 했더라, 이야기를 꺼내자 한쪽이 잊고 있던 기억을 다른 쪽에서 찾아주었다. 동네 식당들이 어려웠을 때 잼과 소스를 모으고 라마홈의 패브릭으로 보자기를 싸서, 서촌의 것을 담은 선물 꾸러미를 마련한 적도 있다. 세세한 준비 과정은 가물가물해도 해보자는 말에 함께 손을 보탰던 즐거움은 남아 있었다.
서로 하고 싶은 방향이 분명해 대화가 잘 통했고, 우연히 동갑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친구라는 이름도 더해졌다. 라마홈이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이곳을 적극적으로 추천해준 사람 역시 윤선 님이다. 그 권유가 없었다면 포도나무 아래 지금의 라마홈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자신도 비슷하게 일을 꾸려가니 상대의 수고를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좋아해서 하는 일에도 고된 날은 있으니, 서로 오래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으리라는 이야기다. 라마홈도 허브를 공부하고 밭을 돌보며 필요한 것을 손수 만드는 친구를 응원한다. 각자의 일상은 달라도 가까이에 그런 시도를 이어가는 이웃이 있어 반갑고, 다음에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요즘 두 사람이 함께 궁리하는 것은 라마홈의 향이다. 그녀는 햇빛에 잘 마른 섬유의 따뜻한 냄새를 떠올리며, 세련되면서도 잔디밭에 털썩 앉을 수 있는 편안함을 담아보고 싶다고 했다. 오래 보아온 이웃에게 라마홈이 그런 모습이었다는 말이 반가웠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서로의 일을 알고 있다가, 마음이 맞는 제안이 생기면 다시 “합시다”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이로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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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일을 가져와 함께 꾸리는 곳
함께할 일을 찾아가는 시도는 구기동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발효 작업을 하는 동료와 윤선 님 모두 작업실이 필요해 자리를 알아보았고, 기획과 홍보를 하는 구성원이 합류하며 세 사람이 한 공간을 나누게 되었다. 약초를 활용한 마실거리와 발효 음식, 재료에 담긴 이야기를 전하는 역할을 각자 맡으면서 공동으로 해볼 일을 고민한다. 좋은 흙에서 농사짓는 이들을 찾아 합당한 값을 지불하고, 그 수확물을 음료와 식사로 만들어 배경까지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공간을 꾸릴 때에는 배워 둔 목공도 활용한다. 테이블의 높이와 선반의 폭을 직접 살피되 큰 공구나 전문 기술이 필요한 부분은 도움을 받는다. 자신의 솜씨를 “내가 필요한 거는 만들어서 쓸 수 있다 정도”라고 설명했다. 어디에 무엇을 놓으면 편한지 몸으로 알아온 경험이 새 작업실의 치수가 되는 셈이다.
더 먼 미래에 살고 싶은 곳을 물으니 이웃과 함께 머물 마을 이야기가 나왔다. 한때는 자급자족을 꿈꾸었지만 옷을 만들려면 실부터 뽑아야 하는지 따져보다,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삶은 어렵겠다고 느꼈다고 했다. 지금은 옷감을 짜거나 요리하고, 머리를 손질하거나 아이를 돌보는 등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나누며 살아갈 모습을 그린다. 늘 모여 있어야 하기보다 한동안 연락하지 않아도 저기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로 안심할 수 있는 거리라면 좋겠다는 말이 오래 남았다.
그곳을 찾기까지 여러 경험을 해보고 공부하며, 언젠가 찾아온 이에게 좋은 말을 건넬 수 있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 오랜 바람이다. 구기동에서 각자의 일을 가져와 함께할 것을 고민하는 지금도, 그녀가 그려온 삶을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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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를 알아차리는 것
이야기 끝에 모호의 여러 활동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가 꺼낸 말은 ‘자각’으로,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스스로 알아차리는 일이 먼저라는 뜻이다.
스트레스가 많다는 한마디 안에도 사정은 제각각일 것이다. 일이 너무 많은지, 관계가 어려운지, 쉬지 못해 지친 것인지 알아보려면 평소의 하루부터 들어야 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새로운 무언가보다 잠을 자거나 쉬는 여유가 먼저 필요한 날도 있다.
돌아가는 길에 ‘나, 조금 쉬는 게 맞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지나치지 않고, 미뤄두었던 필요도 살펴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어디서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싶었던 사람이, 이제는 곁에 온 이와 마주 앉아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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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앉기 전에는 모호에서 하는 일을 조금 더 잘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직 정해지지 않은 부분도 함께 남겨두고 싶어집니다. 하나를 알아가다 생긴 궁금증이 또 다른 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모호의 다양한 활동과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조금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라마홈과의 인연도 미리 계획한 모습대로 이어진 것은 아니겠지요. 동네의 잼과 소스를 천으로 싸던 때에서 포도나무 아래 새 자리를 권해주던 순간까지, 그때 할 수 있는 것을 서로 보태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다음에 “합시다” 하고 시작할 일도 아직 모르지만,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은 든든합니다.
이번에는 그동안 윤선 님이 바라본 라마홈이 어떤 향기였는지 기다려보려 합니다. 햇빛에 잘 마른 리넨의 온기와 잔디밭에 털썩 앉을 수 있는 편안함이 한데 담기면, 어떤 향이 코끝을 간지럽힐까요. 언젠가 그 향을 맡으며, 서로의 삶을 살피고 좋아하는 일을 응원해온 이웃의 시간을 함께 떠올려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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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ahome letter no.9
interview 김민하
photo 천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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